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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philosophy of language

문장과 명제

by jysden 2019. 10. 1.

1. 문장과 명제의 차이(서술문만이 명제에 대응한다를 전제)

문장은 형태를 갖는 구체적 존재자인 반면, 명제는 시공간 속에 위치하지 않은 추상적 존재자이다. '달은 둥글다'라는 문장은 'ㄷ' +'ㅏ'+'ㄹ'+'ㅇ'+'ㅡ'+'ㄴ' ... 등 한 획, 한 획의 선들과 곡선들로 이루어진 글자들의 모임인 반면, 명제는 문장의 내포이고, 추상적 존재자이다. 우리는 이런 존재를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문제를 삼을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우리에게 존재론적 부담을 주는 것 같다.

2. 여러 유형의 문장들

 1) 인지적 의미(참, 거짓을 가질 수 있으면 인지적 의미를 갖는다)를 갖지 않는 문장

 '이빨'이라고 이야기할 때와 '치아'라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것을 갖고 있는 문장 간의 진리치 차이는 없어 보인다. 즉, 이 때 두 용어의 대치는 문장의 진리치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할머니가 이빨을 뽑았다"와 "할머니가 치아를 뽑았다"의 인지적 의미의 차이는 없어 보인다. 

 (1) 우주의 마음 그 서쪽에 검은 시간이 고여 있다

(1) 과 같은 문장은 인지적 의미를 갖지 않고, 따라서 무의미한 문장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것은 명제와 대응되지 않는다.

 2) 다의적인 문장

(2) 톰은 배를 먹었다.

 이 때 배는 타는 배인지, 먹는 배인지, 우리 몸의 배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것은 다른 명제에 대응될 수 있다. (최소한 3개) 특정 문맥이 주어진다면, 이것은 더 분명해질 것이다.

 3) 같은 의미의 여러 문장

 4) 상황 의존적 문장

 이 문장은 언제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대응되는 명제가 달라진다.

(3) 오늘 날씨가 맑다

(3) 문장은 2019년 9월 16일 12시에 볼때는 참이지만, 어느 여름의 장마철의 비 오는 날에 봤을 때는 거짓일 것이다. 

3. 내포적 의미로서의 명제

(4) 'Schnee ist Weiss' means that snow is white

 독일어를 대상 언어로 하고, 영어를 메타 언어로 하는 특정한 독일어를 사용한 문장 (13)을 보자. 이 문장에서도 that 절이 나타난다. 여기서 that 이하의 절은 지시적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means 앞에 있는 대상 언어도 지시적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 That 절 뒤의 절이 지시하는 것이 명제이다.

(5)  'Schnee ist Weiss'는 눈이 희다는 것을 의미한다

(5)에서 '눈이 희다는 것' 표현이 지시하는 것도 명제이다. (4), (5) 에서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눈이 희다>는 명제이다. 이런 종류의 존재자에 대한 지시를 어떤 식의 분석을 통해 제거할 수 있지 않는 한, 우리가 이런 문장을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명제의 존재에 대해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4. 명제적 태도와 명제

know that, believe that, want that 등의 동사는 심적 태도를 말하고, 이것은 명제를 믿는다와 같이 명제에 대해서 가지는 태도를 가진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이것을 보통 명제적 태도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이름[명제적 태도]는 어떤 이론을 시사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명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지금부터 우리는 명제에 대한 여러가지 입장을 알아볼것이다.

 1) 명제적 태도의 대상은 명제라고 보는 입장(Frege, Church)

 (6) Trump believes that snow is white

 트럼프가 이 명제를 받아들임 관계를 B라고 하자. B가 참이려면, 실제로 <snow is white> 명제가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이 경우 우리는 즉시 존재론적 부담이 생긴다는 문제와 마주친다. 즉, 이 경우에 이 명사절(that절)이 어떤 존재자를 지시하고 있어야 한다. 이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불투명 문맥에서 불분명한 지시 관계에 대하여 그것의 외연은 일상적 내포를 그것의 외연으로 가져야 한다는 것이 좀 더 이해될 것이다. (frege의 대응을 상기해보자) 그러면, 여기서 that절 안에 있는 것이 지시하는 것은 그것의 명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1)의 입장을 지지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수, 함수, 집합 같은 내포적 존재자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수학, 논리학 같은 학문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학문들은 우리 현실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는 공학, 실용 과학에 토대가 되는 학문들이다. 만약 이러한 학문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큰 이득을 주고 있는 학문들의 근본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명제가 주는 이익 때문에 1) 입장을 받아들인다.

 2) 명제적 태도의 대상은 사실 명제가 아니라, 문장이라고 보는 입장(Quine, Davidson)

외연적 의미론을 추구하는 학자는 1) 입장에 대하여 불편해 한다. 사실 (6)과 같은 문장이 이야기 하는 것은, 트럼프와 <snow is white> 명제 간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6)과 같은 문장이 참이기 위해 명제가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7)  'Schnee ist Weiss' means that snow is white

주어에 있는 것은 문장에 대해 말하는 것 같고, that 이하의 명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유명론자들은 사실 이런 것도 두 문장 간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것들이 동의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래의 문장 (8)과 같은 것이다.

(8) 'Schnee ist Weiss' is synonyous with 'snow is white'

 이것들이 동의적이면, 그로부터의 추상을 통해서, 서로 동의적인 관계로서의 명제가 있지 않겠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외연론자들은 이것들 [두 문장들]은 단지 동의적이다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하고싶은 말이라고 한다. 가령, 키가 같다라고 할 때, 우리는 키라는 추상적 존재자인 개념이 없어도, 단지 두 사물 간의 키를 비교해보고 비슷한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두 문장들을, 명제라는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도, 단지 동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church의 논증 ( 2) 입장에 대한 1) 입장의 반론)

(6)의 문장을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해보자.

(9) 트럼프가 눈은 희다고 믿는다

 이렇게 번역하고 나면, (9)는 트럼프라는 사람과, '눈은 희다'라는 문장 간의 관계 B를 참인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이해해야 되는데, 과연 이게 원래의 문장 (6)과 같은 내용인가? 트럼프는 한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눈은 희다'라는 태도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고, 따라서 B는 이 경우 거짓인 것이 될 것 같다. 이 경우, 우리는 존재론적 부담을 지더라도, 내포적 존재자를 받아들여야 할 것 같지 않는가? 만약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한국어로 된 문장과 영어로 된 문장은 다른 것을 지시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둘의 의미는 다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둘의 외연은 같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