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philosophy of language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의미

by jysden 2023. 4. 26.

 

재밌는 책 읽었다.

  나는 광활한 우주 어딘가에서 티끌만한 크기로 존재한다. 나는 무한한 과거와 미래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찰나에 순간에 살고 있다. 또한, 나는 공간적으로 우주의 중심에, 지구의 중심에 서 있지 않다. 나는 무한한 시간선 상의 중심에 서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나는 언젠간 이 지구에서 필연적으로 소멸한다. 우주는 여러 물리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시간의 화살은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대부분의 경우에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

  나는 내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물음을 품는다.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왜 이 시점에 이 공간에서  어떤 목적을 갖고 살아가기 위해 태어났는가". 사색적인 누군가가 한번쯤 품어봤을 법한 질문을 내 스스로에게 던진다. 하지만 나는 어떤 만족스러운 답도 내리지 못한다. 이런 종류의 철학적 물음은 무한퇴행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혹자가 위 질문에 대해 "내 삶의 목적은 돈을 많이 버는거야."라고 답을 했다면, 그는 다시 "왜 나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가"를 물을 수 있고, 이 물음에 대해 "돈을 많이 벌어서 화려한 옷을 사 입을거야"라고 답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답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 자는 더 나아가 "왜 화려한 옷을 사 입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더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방식의 사색은 끊임없는 물음을 남길 뿐이다.

   세계에 대한 탐구는 우리 삶의 목적에 해답을 주는가. 인류는 너무 오랫동안 본인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우주적 과잉 존재감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이전 시대에 사물의 자연적 운동은 지구를 중심으로 가까워지거나 멀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과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믿어왔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이러한 인류 중심적 세계관에 굴욕을 주었다. 뉴턴의 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무너뜨렸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천동설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이들 현대 과학은 인류에게 경험적 관찰과 물리적 이론을 토대로 올바른 세계관을 정립해주었지만, 이것은 우주가 우리를 중심으로 생겨났고,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는 믿음을 꺾어버렸다. 현대에 들어 우리는 우주의 중심에 있지도, 우주가 우리를 기준으로 운동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현대 과학에 대한 우리의 앎은, 존재론적인 맥락에서 말할 때, 우리에게 우주는 기계적인 자연 법칙에 따라 운동한다는 것만을 알려줄 뿐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 기계적인 세계에 대한 지식은 삶의 목적을 찾고자 하는 나의 갈망에 어떠한 해소도 제공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현대 과학으로부터 넓게 펼쳐진 세계의 변두리 어딘가에 티끌만한 크기로 존재하며 찰나의 시간만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우리 존재의 무가치함을 느끼게 될지 모른다. 나아가, 우리는 모든 생명력을 태워 얻을 삶의 성취감이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 한 없이 작은 무언가임을 느끼며 우리 삶에 대한 무의미를 느낄지 모른다.

  내면에서의 사색도, 세계에 대한 앎도 내 삶의 목적과 존재 이유에 대해 답해주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이들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 기계적인 드넓은 세상에서 미물로서의 나에 대해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허무주의 입장을 취하는 것은 분명 불만족스럽다. 대부분 우리는 인생을 시지프스의 형벌과 같이 무의미한 일상을 반복하는 삶으로 남긴 채 생을 마감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알베르 카뮈는 삶의 목적을 갈구하는 우리의 결핍과 무응답으로 일관하는 세계 간의 절연에 대해 "부조리"라고 표현한다. 카뮈는 우리에게 이 부조리가 낳는 삶의 무의미에 의해 체념하지 말고, 이러한 운명이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견디며 살아가기를 조언한다. 미국의 분석철학자인 토마스 네이글은 우리 안에 <밀어닥치는 삶을 살아가는 일인칭적 관점>과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자신을 성찰하는 삼인칭 관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전자의 관점에 따를 때, "화려한 옷은 이쁘니까 입어요", "고기는 맛있으니까 먹어요" 같은 생각은 그 자체로 정당화된다. 즉, 이 관점은 무한퇴행에 빠지지 않는다. 반면, 후자의 관점에 따를 때에는 끊임없는 객관적 정당화가 요구되며 무한퇴행에 빠지게 된다: "왜 돈을 벌어요?", "고기를 사먹으려구요", "왜 고기를 사먹어요?", "맛있으니까요", "왜 맛있는 것을 먹으려고 해요?"   . 앞에서 보았던 우리 내면의 사색은 이 삼인칭 관점에서의 탐구에 해당하는 것이다. 네이글은 우리 안에서 이 두 관점의 공존에 대한 아이러니를 수용하는 태도를 취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카뮈, 네이글의 조언들은 실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어떠한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 것 같다. "윤리적 판단의 궁극적 요지는 실천을 인도하는 것" [6]이라는 피터 싱어의 말에 따를 때, 이들의 조언은 실천적인 측면에서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나의 윤리적 판단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이들이 부조리에 대해 심층적인 분석의 결과로 위 같은 조언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들은 내게 아무런 울림도 주지 않는 것 같다.

    카뮈, 네이글, 그리고 다른 여느 사색가들의 접근과 다르게, 삶의 의미와 목적, 내 존재의 이유 등과 같은 물음은 세계에 대한 앎으로부터, 내면의 사색으로부터 얻어질 수 있는 답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이런 종류의 물음에 대한 답은 삶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통찰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혹자는 어린 시절 지독한 가난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나는 가난한 자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할거야'라는 삶의 목적을 가질 수 있고, 또 다른 자는 어릴 때부터 수학 문제 풀이 경험에 매료되어 '나는 여러 수학적 난제를 해결하고 복잡한 수학을 명료하게 설명하는 삶을 살거야' 라는 목적 및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유를 가질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항구적이지도 유일적이지도 않다. 이러한 목적과 이유는 여러 시점에서 여러 개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내 삶의 의미, 존재 이유를 탐구하기 위해 세계에 대한 탐구로부터 우주에서의 나의 위치를 알고자 하는 것은 그 접근부터 잘못된 것이다. 나를 위해 주어진 운명 같은 것은 없다. 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호소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증은 어떤 누구에게도 설득적이지 않다. "내가 왜 이 시점에 이 공간에서 태어났는가",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내 삶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한 물음은 삶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통찰을 통해 스스로 설정하고 답해나가야 할 뿐이다. 

참고 문헌

[1] 최성호,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 서울: 필로소픽, 2022
[2] 이서규.(2014).카뮈의 반항개념에 대한 고찰.철학논총,75(),211-242.
[3] 최성호. (2019).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부조리의 철학: 카뮈와 네이글에 대한 독법. 철학적 분석, 41, 33-59.
[4] Nagel, T., 1971, ‘The Absurd’, The Journal of Philosophy, 68: 716-727. , 1986, The View from Nowher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5] 알베르 카뮈 저, 김화영 역. 『시지프 신화』. 서울: 책세상, 2020
[6] 피터 싱어 저, 황경식∙김성동 역 『실천 윤리학』. 서울: 연암서가,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