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philosophy of language

전면적 지시 이론

by jysden 2023. 12. 29.

  19세기 이전의 근세 철학이 주로 인식론적인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면, 19세기 말부터 철학은 논리-언어적인 것에 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이유는 짐작컨대, 자연과학, 사회과학 등의 분야가 철학에서 분리됨으로써 철학의 정체성이 옅어졌기에 철학자들은 그들이 집중할 탐구 대상에 대해 재설정할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철학자들에게 언어에 대한 탐구는 아래 이유들 때문에 중요했다.

1. 철학의 작업은 언어를 매개로 한다.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공적으로 토론되거나 분석될 수 있는 종류의 사유여야 한다. 이러한 사유는 언어를 매개로 한다. 따라서 언어 자체에 대해 탐구하고 이해하는 것은 철학 자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2. 철학적 작업의 많은 부분은 이미 언어에 대한 탐구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등은 문답법을 통해 그 의미를 찾아나가는 작업이었다. 근대에 와서도, 흄의 '인과란 무엇인가' 등은 언어에 대한 탐구를 명목적으로 수행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 또한 언어에 대한 탐구였다.

3. 다수의 철학적 물음은 의미의 명료화에 의해 해소될 수 있다. 가령, 일상적인 예를 들자면,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태어나자마자 1살로 간주하는가" 물음은 우리나라에서 1살이라는 것은 서수적인 의미를 가지고 이는 태어난 지 첫 번째 해라는 의미를 가진다는 반면, 미국의 경우 나이를 기수적 의미로 사용한다는 앎에 의해 해소될 수 있다. 이들은 의미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것 때문에 차이가 발생하는 것인데, 이것이 마치 사실의 문제인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앞에서 보았듯이 언어의 의미 차이를 명료히 인지하면 해소될 수 있는 물음이다. 

  19세기 말 프레게가 새로운 논리학을 소개한 뒤로, 러셀, 비트겐슈타인, 카르납 등의 논리 실증주의도 이 이상 언어를 다루는 새로운 논리학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를 하였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일상언어학파인 무어와 라일 등은, 프레게의 새로운 논리학을 옹호하기 보다는, 이론적으로 이상 언어를 만들고자할 때 일상 언어의 중요성을 가볍게 여길 수 있다고 말하며 일상 언어의 무질서함을 받아들이면서 기술하는 데 만족하자는 입장을 취하곤 했다. 이들의 논쟁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들의 연구 자료를 참고 발췌하여 기본적인 개념들을 정리해보자.

  먼저, 명제, 문장, 명제 태도에 대한 구분을 알아보자. 명제는 (뒤에서 볼 문장과 달리) 진리치를 가질 수 있다. 즉 임의의 명제는 참 또는 거짓과 같은 진리값을 가질 수 있다.이 명제는 추상적 존재자로서 시공간을 점유하지 않고, 인과적 힘도 갖지 않고, 오직 우리의 사유 속에서만 존재한다. 또한, 명제는 문장의 의미로도 간주될 수 있고, (Frege, Church 등에 따르면) 믿음, 희망 등의 심리 상태의 대상으로도 간주될 수 있다. 문장이란 낱말들의 집합이다. 즉, '나는 나비다' 문장은 '나','는',' ','나','비','다' 라는 글자들의 집합이다. 이 문장은 의미가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 가령, (Z) "빨간 기쁨이 애처롭게 운다"는 무의미하지만 하나의 문장이 될 수 있다. 이 (Z)는 문장이 될 수 있지만 참/거짓을 갖지 않기 때문에 명제가 될 수는 없다. 또한, (W-1) 강아지가 눈을 먹었다, (W-2) 강아지들이 위험하다 역시 문장이 될 수 있지만 다의적이기 때문에 진리치를 갖지 못하여 명제가 될 수 없다. (W-1)은 강아지가 먹은 것이 생명체의 눈인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고, (W-2)는 강아지 자신들이 위험한 것인지, 강아지들이 다른 생명체 (예컨대, 갓난 아기)에게 위험한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정 문맥이 주어져야 더 분명해질 수 있다. 명제 태도란 'He believes that ~' 같은 문장이 있을 때 that 이하 절이다. 이 곳에는 소원, 믿음, 판단 등의 대상이나 내용이 올 수 있다.

  하지만 위에서 명제는 문장의 의미로, 명제 태도의 심리 상태의 대상으로도 간주될 수 있는 추상적 존재자라고 말했지만, 일부 철학자들에게 이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상이다. 명제가 수, 함수와 같이 추상적 존재자로서 존재한다는 실재론자와 다르게, 유명론자는 추상적 대상은 오직 이름으로만, 즉 명목적으로만 존재한다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유명론자들은 분석을 통해 추상적 대상을 제거함으로써 추상적 대상의 수를 줄이는 데 취향이 있었다. 분명, 추상적 대상인 명제가 실제로 (나무, 컴퓨터 등과 같이) 구체적 존재자처럼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명제를 인정하게 되는 이유를 이야기하는 데 지시적 의미 이론 (denotative theory of meaning)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전면적인 지시적(denotative) 혹은 지칭적 (referential) 의미 이론은 "한 낱말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고, 한 낱말의 의미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인 것처럼, 한 문장의 의미는 그것이 표현하는 명제"라는 생각이다. 이 이론은 아래 같은 동의성 문장이 놓여 있을 때 이들의 동의성을 인지하는 데 유용할 수 있다. 

(A) 샛별(새벽에 동쪽 하늘에 뜬 별)이다.

(B) 개밥바라기(저녁에 서쪽 하늘에 뜬 별)다.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둘다 동일하게 금성을 지칭하기 때문에, (A)와 (B)는 동일한 명제이다. 명제의 존재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A)와 (B)가 동의적임을 알 수 있고 이는 명제 존재자의 수용이 유용하고 직관적이라는 점을 함축한다. (한편, 문장으로서의 (A)와 문장으로서의 (B)는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서로 다른 낱말이기 때문에 동일한 문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전술하였듯이 문장은 낱말들의 집합인데 두 문장은 낱말의 집합이 동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같이 (A)에서의 낱말 '샛별'과 동일한 대상을 지칭하는 '개밥바라기'로 낱말을 교체했을 때에도 진리값이 보존되는 경우를 공외연적 명사의 상호 대치성이라 한다. 즉, 두 명사 A,B가 같은 지시체를 갖는 경우, "명사 A는 명사 B가 발생하는 어떤 문장에서도 그 문장의 진리값을 변경시키지 않고도 명사 B로 대치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전면적인 지시 이론을 더 엄밀하게 살펴보자면 아래 같은 난관에 부딪힌다.

(C) The dog is on the mat

 (C)에서 우리는 'on', 'the'가 의미하는 바는 그것의 지시체일텐데, 이 낱말들의 지시체가 존재한다고 보기에는 직관적으로 어렵다. 심지어, dog 경우에도 내 앞에 있는 바로 저 dog이 아닌 한, 특정한 dog을 지칭하지 않는 한, 그 dog의 지시체가 무엇인지, 과연 dog이 어떤 특정한 지시체를 갖는지 알기 어려울 수 있다. 다른 한편, 전면적 지시 이론에서는 낱말/문장의 의미를 지시체로 규정하는데, 사실 이 의미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불명료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의미를 지시체가 아닌 다른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한 예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용도(usage) 개념을 갖고 의미를 설명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에 따르면, 언어 표현들은 그저 어떤 언어 밖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명명하거나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언어 속에서 일정한 역할과 기능을 가진다. 그리하여 한 표현의 의미를 배우는 것은 그러한 역할에 맞춰 그 표현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따라서 한 명사의 의미를 아는 것은, 그 명사가 나타나거나 나타날 수 있는 진술, 물음, 명령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언어적 활동 속에서, 그 명사의 적법한 쓰임새를 통제하는 규칙이나 규약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의미를 설명하는 한 예일 뿐,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이 만족스러운 이론이라는 것이 아니다. 의미는 지시체 뿐만 아니라 용도에 의해서도 설명될 수 있다는 대안을 제시한 것 뿐이다. 

참고 문헌

[1]  M.K 뮤니츠, 『현대 분석 철학』 (서울: 서광사, 1996년)

[2] 선우환 교수님 『언어 철학』 강의록

[3] A.C 그렐링 『철학적 논리학』 (서울: 선학사, 200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