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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Metaphysics

Chris Daly, ‘기반에 대한 회의주의’

by jysden 2025. 12. 31.

2.1 들어가며

 

 과연 기반에 대한 (이론)은 가지적인 것인가? 이 개념이 최소한으로 주장하는 것을 지지하는 2 가지 전략: (1) 이미 잘 정의되어 있는 다른 용어를 사용하여 ‘기반’ 정의하기, (2) ‘기반’은 원초어지만, 그 의미를 전달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본고는 (2)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 전략들에 응답할 것이다. 본고의 쟁점은 [원초어라고 다뤄지는] ‘기반’이 불가지적이라는 것이다.

 

2.2 논의되는 주장들

 

 쉐퍼, 로젠, 아우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과는 일종의 결정에 대한 일반적인 관계일 뿐이다. 사실 인과적 결정, 필연화를 동반한 다양한 종류의 비인과적 결정이 있다. 두 가지 관계의 범주를 추가하자면, 수반, 존재론적 의존, 기반이 있다. 이에 대한 그들의 해명은 다음과 같다. 게다가, 기반은 다른 용어로 이해될 수 없다.

 분명히 해야 할 2 가지가 있다. (1) 위 3 학자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다. 가령, 그들은 기반 관계의 관계항이라는 것에 대해 거부한다. 우리는 로젠, 아우디를 따라서, 기반 관계의 관계항을 “사실”이라고 할 것이고, a는 F이다라는 사실을 [Fa]라고 표현할 것이다. (2) 이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자가 없으면, 이들 중 하나 또는 다른 자들의 주장을 고려한다는 의미에서 위 세 학자에게 귀속된 견해는 총체적 견해이다. 다음의 3 가지는 그들의 총체적 견해이다:

 

  1. ‘기반’은 가지적이다. 
  2. 용어 ‘기반’은 원초적이다. 
  3. 기반 개념은 유용하다.

 

 달리는 ‘기반’을 이미 더 잘 이해된 용어를 가지고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우리는 ‘[Fa]는 [Fb]에 기반한다.’를 필연성, 본질, 수반 개념에 의해 정의하는 것을 시도해볼 수 있다. 필연성 하나만을 가지고 말하자면, 가령, ‘[Fa]는 [Fb]에 의해 필연화된다.’와 같이 말이다. 이 정의에 반대하는 로젠, 아우디 등은 주장 ② 를 제공한다.

 

 ◼︎ 어떻게 기반 개념이 가지적일 수 있는가에 대한 기반 이론가들의 3 가지 응답 (①에 대한 응답)

 

 (1) 위 세 학자들은 ‘기반’의 형식적 속성이 있다고 간주한다: 기반 관계는 비재귀적, 비대칭적, 이행적이다. 

 덧붙일 속성들:

 

  - 이 관계는 사실적이다. ( 만약 [Fa]는 [Fb]에 기반한다면, 이 두 사실은 존재한다.) 

  - 이 관계는 비단조적non-monotonic이다. (만약 [Fa]는 [Fb]에 기반한다면, [Fa]는 “[Fb]와 모든 다른 사실” 에 기반한다는 것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

  - 이 관계는 관계적이다. (“[Fb]를 기반하는 어떤 다른 사실, [Hc]가 존재한다는 것”이 “[Fa]를 기반하는 [Fb]”에 일관적이다.

  - 이 관계는 부분적이다 ([Fa]를 기반하는 어떤 다른 사실 [Id]가 존재한다는 것은 [Fa]를 기반하는 [Gb]에 일관적이다.)

  - 이 관계는 초내포적이다. (비록 [Fa]가 [Gb]를 기반할지라도,  <[Fa]가 존재한다> 명제는 <[Hc]가 존재한다> 명제와 논리적으로 동치이고, [Hc]가 [Gb]를 기반한다는 것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 

  - 확장과 모순 추론은 이에 대해 타당하지 않다. 이것은 범주-중립적이다.

  - 이 관계는 형이상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만약 [Fa]가 [Gb]에 기반한다면, 이것은 F, G에 대한 사실을 지배하는 형이상학적 법칙 때문이다.)

 

(2) 위 세 학자는 ‘기반’이 (우리가 사전적인 이해를 아마도 갖고 있는)—‘근본적인’, ‘존재하는’, ‘환원’ 같은— 중요한 용어와 분석적으로 관련된다고 명시한다.

 

(3) 기반 개념의 해명을 위해 친숙한 사례를 사용한다. 이러한 사례의 사용은 우리에게 더 좋은 이해를 얻게 해 줄 수 있다.

 

 2.3 회의주의적 전략을 선택하기

 

 () ①을 거부하는 것이 유망하다: 아래의 선택지들 중에서 선택지 (1)을 채택하는 것이 가장 유망하다.

 

선택지 (1): 만약 용어 t가 불가지적이라면, 그것은 원초적 의미 조차도 결여한다. 따라서 주장 ①에 맞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동적으로 주장 ②에 맞선다. 하지만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원초적 의미를 결여하는 어떤 용어는 정의되어질 수 있고, 따라서 불가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장 ①에 맞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저절로 주장 ③에 맞선다. 하지만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원초적 의미를 결여하는 어떤 용어는 정의되어질 수 있고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략은 가장 유망하다는 점 때문에만 가장 훌륭한 선택지라고 전망한다. (그러나 왜 이게 가장 유망한가? 다음의 2,3 번째 전략과 비교해보자)

 

  선택지 (2): <①을 수용 & ②를 거부>하는 것은 “‘기반’이 정의될 수 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 때문에, 상대방의 계략에 빠지는 것이다.

 

선택지 (3): <①,②를 수용 & ③을 거부>하는 입장이 있다. 회의론자의 과제는, 모든 기반과 관련된 문제는, 기반에 대한 말은 고려하지 않고서도, 동등하게 잘 정식화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고, 따라서 그 기반에 대한 말이 무용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①을 수용한 회의론자가 — 기반에 대한 말이 이 쟁점에 어떠한 해명적 가치도 더해주지 않음을 보임으로써 — 단지 약간의 쟁점을 제거하는 것은 제한적인 가치만을 가질 뿐이다. 이 회의론자들은 기반에 대한 말을 전복시킬 수 없다. 대신에, <그들이 ①을 수용하더라도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은 기반에 대한 말이 설명적으로 공허하다는 것일 뿐이다. 

 

 () 선택지 (3) 안에 있는 “설명적으로 공허하다는 것”은 3 가지 방식으로 말해질 수 있다.

 

 어떻게 회의론자들은 ③을 거부하면서도 더 나아갈 수 있을까? 어떤 주어진 가설이 설명적으로 공허하다는 것은 3 가지 방식으로 말해질 수 있다: 1) 그 가설은 현상을 재부착relabel한 것일 뿐이다. 2) 책임을 다른 데 전가하는 것이다. 3) 모호하다. 이들을 차례대로 고려해보자.

 

1) 그 가설은 현상을 설명할 목적으로 재부착한 것일 뿐이다. (1-1) 가설의 가정된 설명항은 피설명항과 동일한 내용을 갖는다.  (1-2)  피설명항보다 더 많은 내용을 가진 가정된 설명항과 관련된다.

 

  1-1) “가설의 가정된 설명항”은 피설명항과 동일한 내용을 갖는다. 설명이 비재귀적임을 고려할 때, 그 가설은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다음으로, 기반 가설은 <어떤 사실이 성립하는 것>을 참으로 만드는 것을 말함으로써, 어떤 양상적 현상을 설명하려 한다. (Audi). 

 양상적 현상을 포함한 다음의 예를 보자. ▲ <자연적 속성과 구분 불가능한 대상>은 <규범적 속성에 대해> 구분 불가능하다. <함수적 속성에 대해 구분 불가능한 대상>과 <그 환경>은 <그것의 명제적 태도에 대해> 구분 불가능하다. 그리고 < 부분들에 대해 구분 불가능한 복합 대상은 구분 불가능하다. “기반 가설은 그것의 설명항과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이 기반 가설은 ‘기반’, ‘때문에’ 용어 사용없이 설명된다고 가정해보자. 가령, 우리는 대상의 구분불가능성이 가능세계 의미론과 속성에 대한 양화를 사용함으로써 설명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Q. 내용이 같다는 것이 가정되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러한 종류의 말[앞의 예]은 기반을 통해 잘 설명될 수 있고, 그 반대도 그렇지 않는가? 첫 번째 선택지는 유망하지 않아 보인다: 예를 들자면, 진리적 필연성과 가능성이 기반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직 두 번째 선택지만을 남기게 한다: 기반에 대한 말은 다른 용어로 설명되어진다는 것이다. 즉, 기반은 원초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 귀결은 쉐퍼와 다른 학자들이 제시한 이유 때문에 (과연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그러므로, 기반 가설이 설명항과 동일한 내용을 가진다는 가정을 거부할 근거들이 있다.

 

  1-2) 기반 가설은 설명항 보다 더 많은 내용을 갖지만, 그것은 단지 그 [내용]을 설명하지 않고서 그 설명항을 재부착할 뿐이다. 예를 들자면, 사건들이 있다고 운명지어진 가설은 이런 의미에서 설명적으로 공허하다. 그 가설에 따르면,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 iff 사건이 발생할 운명에 처해있다. 사건 e는 발생할 운명에 처해있다고 말하는 것은 e가 발생했다고 말하는 것 보다 더 많은 내용을 갖는다. 그러나 그 가설은 설명적으로 공허하다. 왜냐하면 그 가설은 어떠한 것도 규정rule하지 못하고, 단지 운명지어진 것만을 결정하는 것에 대한 독립적인 방식이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만약 그 가설이 독립적으로 시험되어질 수 없다면, 어떤 가설은 설명적으로 공허하다고 말해질 수 있다. (헴펠1965, 새먼 1984, 1989)

달리는 헴펠과 새먼의 기준이 불명료하다고 지적하면서 그것을 거부하고, 기반 가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준을 위배하지 않다는 것을 보인다. <기반 가설에 대한 기준의 함축이 무엇인지>는 <그 가설이 어떤 경험적 현상을 설명해야 하는지 여부>에 의존한다. 기반 가설은 적어도 하나의 경험적 현상과 관련이 있거나, 또는 어떠한 경험적 현상과도 관련이 없다. 기반 가설은 (비공허 집합과 그 원소들에 대한 사실 같은) 비경험적 현상과 (가령, 성향적, 범주적 사실) 경험적 현상과 관련된다. 기반 가설은 이 사실들의 순서쌍 간에 성립한다고 여겨지는 기반 관계와 관련이 있고, 그 쟁점은 이 관계가 이 순서쌍들  사이에서 성립하는지 여부가 경험적인 문제인지 여부이다.

 

  1-2-a) <그 기반 관계가 다양한 사실들의 순서쌍 간에 성립하는지 여부>가 경험적인 문제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이 쟁점은 기반 가설이 과학적 확증에 열려 있는지, 과학적 반증에 열려있는지에 대해 열려있다. 그 문제는 불분명하다.

<기반 가설이 과학적 확증에 열려있다>고 간주해보자. 기반 이론가는 수학적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불가결성 논증(콰인 1951, 퍼트남 1971)과 유사한 논증을 전개한다. 기반 이론가는 기반 가설은 어떻게 경험적 (그리고 비경험적) 세계가 만들어지는 지(구조화되는지)에 대한 높은-준위의 가설이고, 그 가설은 우리의 총체적 이론으로 만들어진 성공적인 예측에서 간접적인 증거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관련된 요점은 이것이다: 만약 기반 관계가 어떤 사실들의 순서쌍 사이에 성립한다는 것이 경험적 문제라면, 기반 이론가는 적어도 그들의 기반 가설이 그것은 단지 현상을 재서술할 뿐이기 때문에 설명적으로 공허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좋은 초기 사례를 가질 것이다.

 

  1-2-b) 이번에는 그것이 경험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헴펠과 새먼의 독립적 시험가능성 기준은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그 가설은 오직 경험적 현상만을 설명하고자 하는 가설이기 때문이다. 그 기준은 그 가설이 단지 설명항을 재서술할 뿐이기 때문에 어떤 가설이 설명적으로 공허할 수 있다는 두 번째 방식을 뒷받침했다.

요약하자면, 가설이 설명하려는 그 현상을 재부착할 뿐이기 때문에, 기반 가설이 설명적으로 공허하다는 주장을 만드는 2 가지의 방식이 있다. 그들 중 어떤 방식이든지 간에, 기반 가설은 설명적으로 공허하지 않아 보인다.

 

2) 어떤 가설은 그것이 ‘책임을 전가하기’ 때문에 설명적으로 공허하다. 이것은 그 가설이 어떤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같은 현상에 대한 다른 사례를 연루시킬 뿐임을 의미한다. 예를 들자면, <감각 자료 이론>은 이 가설을 실패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지각perception은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을 표상한다: <당신 앞에 있는 빨간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에 대한 경험은 <당신 앞에 있는 빨간 무언가가 있음>을 표상한다. 이 감각 자료 이론은 지각이 이것을 표상하는 방법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 이론은 <당신 앞에 있는 빨간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에 대한 경험은 <당신이 빨간 정신적 대상 (감각 자료)에 주목하고 있음>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이론은 <당신 앞에 있는 빨간 무언가가 있음>을 당신이 표상하는 것에 연루시킨다. 이 감각 자료 이론은 <어떻게 지각이 세계를 표상하는가를 설명하는 과업>을 성취하지 못했거나 그것은 뒤로 미뤄졌다. (잭슨)

기반에 대한 말이 설명적이라는 가설은 ‘책임 전가’에 대한 죄를 짓고 있지 않아 보인다. (1)에서 보았듯이, 기반 논의는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자면, 왜 <자연적 속성에 대해 식별 불가능한 대상>이 <규범적 속성에 대해 식별 불가능한 지>에 대한 설명은, 규범적 속성에 기반하는 자연적 속성을 통해 설명된다. 이 설명은 책임 전가와 관련되지 않아 보인다. 종류의 사실 (한 측면에서 구분 불가능성에 대한 사실은 다른 측면에서 구분 불가능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동반된다)은 다른 종류의 사실 (무엇을 기반하는가에 대한 사실)을 통해 설명되어진다. 동일한 종류의 더 많은 사실을 통해 한 종류의 사실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없다.

 

(3) 매우 모호하기 때문에 어떤 가설이 설명적으로 공허할 수 있다. 보통,  가설이 모호할수록, 덜 설명적이다. 그러나 가설이 더 모호할수록, 덜 가지적이라는 점 (즉, 가설의 내용의 이해가 줄어든다는 점)에도 주목하자. 예를 들자면, ‘무는 무화한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그것이 가지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카르납 1932) 모호함과 가지성 연결은 기반에 대한 말이 모호함에 대한 기반에 대해 설명적으로 공허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기반’이 가지적인 용어라는 승인과 비일관적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따라서 우리는 주장 ① [기반은 가지적이다]를 인정할 수 없고, 기반 논의는, 그것이 가진 깊은 모호성 때문에, 설명적으로 공허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요약하자면, <주장① 동의 & ② 거부>는 ‘기반’이 정의될 수 있다는 기반 이론가들에게는 신뢰를 더해준다. 하지만 <① 동의 & ③ 거부>는 기반 논의가 설명적으로 공허하다는 책임을 정당화시키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왜 어떤 가설은 설명적으로 공허한지에 대해 조사해보았다. 우리는 그 이유들이 기반 가설이 설명적으로 공허하다는 것을 보이는 데 실패하거나, 또는 그것을 보이는 데 성공하더라도, 그 이유들과 ①이 비일관적이게 된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러면, 제거에 의하여, 기반에 대한 최선의 회의주의적 전략은 <기반은 가지적>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2.4 회의주의적 전략 실행하기

 

호프웨버, 올리버, 굿맨도 ‘때문에’ 단어의 모호성을 지적한다. 루이스는 그가 수반에 대한 설명 - ‘존재에 대한 모호한 거부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존재론적 선험성에 대한 주장 또는 번역가능성에 대한 주장’ - 을 옹호할 때, 존재론적 선험성에 대한 말을 피한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비인과적 결정에 기반에 대한 회의주의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수반, 반사실 조건문, 부분-전체 관계는 가지적이고 유용하다. 특별한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오직 기반의 경우에서만이다. 이 점은 회의론자의 경우를 강화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물리주의에 대핸 도는 형이상학적 설명에 대한 말을 이해하는 적절한 도구를 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그러한 말은 기반에 대한 말을 통해 이해될 필요가 없다. 가령, 기반 개념은 물리주의에 대한 현대의 논의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배리 로워는 물리주의를 ‘근본적인 속성과 사실은 물리적이고 다른 모든 것은 그것들 때문에 성립한다’는 견해로 특징짓는다. 그러나 기반에 대한 회의론자는 수반을 통하여 친숙한 선을 따라 물리주의를 정식화한다. 회의론자가 ‘때문에’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한, 그는 모든 사실이 근본적인 물리적 사실을 수반한다는 말을 사용하면서 ‘때문에’를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물리적 존재자가 근본적이라는 의미는, 모든 다른 존재자들의 행동(작동 방식)이 그것들을 통해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고, 그 반대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회의론자의 전략은 실행될 수 있는가? 회의론자는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한 부분은 그의 철학적 양심이 그에게 말하는 것을 기록하는 것과 관련한다. 다른 부분은 <기반에 대한 말이 가지적>이라는 반대 측의 책임에 대한 거부로 구성된다.

 

 2.5 철학적 양심

 

굿맨(1954)은 주장 ①과 관련한다. 그는 회의론자의 전략의 첫 번째 부분과 관련된 3 가지 점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a) 우리는 가지적이거나 아닌 것을 구분할 건전한 일반 원리를 갖고 있지 않다. (b) 그 원리의 결여는 그 구분을 붕괴하지 않거나 신용을 잃게 만들지 않는다. (c) 그 원리가 없으면, 개인은 오직 그의 철학적 양심을 탐색할 수 있을 뿐이다. 굿맨의 철학적 양심에 대한 말은 가지적인 것과 아닌 것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추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음을 비유적인 방식으로 지적한다. 따라서 ‘기반’의 가지성에 대한 회의론자는 그의 견해에 추가적인 증거를 제공할 의무가 없다. 

물론 기반 이론가도 위와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 그는 원초어 ‘기반’을,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모르고서도, 다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회의론자가 가진 곤경을 찾을 수 있다. 어떻게 <이전 결과를 만족한다는 것>이 <우리가 성취할 철학적 견해[기반은 가지적]에 대한 교환을 기대하는 것>에 부분적으로 의존하는가? 루이스는 다른 곳에서 철학 논증의 목적은 ‘합일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입장 설명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1999). 이것은 거짓된 딜레마처럼 보인다. 우리는 우리의 논증이 설득적으로 되기를 원하고, 만약 당신이 자신의 입장에 대한 논증이 다른 누군가에게 설득적이지 못하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자신의 (원래 취했던) 그 입장에 남아있어야 하는지 여부를 재고하게 해준다. 만약 당신이 청중의 지적인 신뢰에 의문을 품을 이유를 갖지 않는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발견했던 무언가를 잃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루이스는 비록 그가 방법을 알지는 못했을지라도 ‘단원소집합’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기반 이론가는 자신들이 ‘기반’을 더 튼튼하게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옹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그 주장을 지지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회의론자의 사례의 두 번째 부분은 그 이유들을 거부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2.6 우리는기반 이해하지 못하는가?

 

 이론-상대적 원초어 (RP)와 절대적 원초어 (AP)가 구분될 수 있다. 

 

(RP) 어떤 용어 t는 어떤 이론 T에 대해 원초적이다 if t는 T의 (다른) 단어로 정의될 수 없다

 

(RP)는 기반 이론가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AP)를 원한다. 우리는 (RP)를 이용하여 (AP)를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의 T는 어떤 측면에서 특권을 얻는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문제의 그 T를 모든 참 이론들의 연언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아니면, 우리는 그 이론을 우리의 총체적 이론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우리가 지지하는 이론들의 연언)

원초적인 비언어적 존재자를 말할 때, 우리는 만약 e가 절대적인 원초어 t에 의해 지시된다면, e는 원초적 존재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반 이론가의 목적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기반 이론가는 한 용어가, 그 용어가 고른 존재자나 존재자의 종류가 원초적이지 않더라도, 원초적일 수 있게 허용 하기를 바란다. 예를 들자면, 용어 ‘전체’, ‘부분’은 정의될 수 없지만, 전체에 대한 사실은 그 부분들에 대한 사실에 기반하고, 따라서 전체는 원초적인 종류의 존재자가 아니라고 말해질 수 있다. 기반 이론가는 기반을 통해 원초적 존재자의 본질 what it is에 대한 설명을 찾을 수 있다. 이 접근에 대해 말하자면, e는 원초적 존재자이다 iff 어떤 것도 e를 기반하지 않는다.

어떤 주어진 이론에 의해 원초적이라고 선택된 어떤 용어도 정보적인 설명을 통해 명료화되어야 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기반 이론가는 ‘기반’을 설명하고자 한다. (a) 기반의 논리적 속성을 명시함으로써, (b) 기반과 다른 용어를 연결함으로써, (c)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이것들은 기반 이론가들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a) ‘기반’의 논리적 속성에 대해 상술하는 것은 그 내용을 결정하는 것 없이 그것이 갖는 어떤 내용도 제약할 것이다. ‘[Fx]는 [Gy]를 설명한다’ 형식의 문장과 관련된 용어 ‘설명하다’의 사용을 생각해보자. 여기서, ‘설명하다’는 앞에서 열거된 각각의 형식적 특성을 가진다. (2.2의 (1) 참고) 그러나 ‘설명하다’와 ‘기반하다’는 그것들의 가정된 외연에 있어서 다르다: 원인은 결과를 기반하지 않지만, 원인은 결과를 설명한다. (Rosen, Audi) 로젠과 아우디는 결과를 기반하지 않는 원인을 명료화한다. 로젠은 [Fa]가 [Gb]를 기반하는 경우에, 명제 <Gb>가 명제 <Fa>를 함축한다고 말한다 (2010). 그러나 c가 e를 야기하는 경우에, <c가 발생한다>는 명제는 <e가 발생한다>는 명제를 함축하지 않는다. 아우디는 로젠과 같은 주장을 한다: 만약 [Fa]가 [Gb]를 기반한다면, [Fa]가 [Gb]를 기반한다는 것은 [Fa]에 대해 본질적essential이다. 그러나 만약 c가 e를 야기한다면, 그것이 e를 야기한다는 것은 c에 대해 본질적이지 않다.

이 설명에서, 원인은 그 결과를 기반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인은 결과를 설명하고, ‘설명하다’와 ‘기반하다’는 다른 내용을 갖는다는 것이 추론된다. 결국 ‘기반’의 논리적 속성은 그 내용에 고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b) <어떤 용어를 이해하는 한 방법>은 그 용어와 이미 이해된 다른 용어들의 분석적인 연결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 때 기반 이론가의 시도가 마주하는 곤경은 호소된 그 용어들은 ‘기반’과 매우 밀접하게 비슷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이 (여전히) 모호하거나, 또는 호소된 그 용어들은 충분히 독립적으로 분명하지만 그것과 ‘기반’과의 연결은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쉐퍼와 로젠이 제시한 (기반과 다른 용어 간) 연결을 고려해보자. 우리가 운좋게도 대표적인 경우를 선택했다고 해보자. 여기서 만들어진 이 문제가 나머지 경우에 어떻게 적용하는지를 아는 것은 직접적인 문제여야 한다. 먼저, ‘기반’은 ‘근본성’과 ‘실재의 정도’와 연결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fg) x는 근본적이다 iff 어떤 것도 x를 기반하지 않는다.

 

위 정의는 ‘기반’을 통해 ‘근본적인’을 정의하기 때문에, 우리가 ‘근본적인’에 대해 가진 어떠한 이해도 ‘기반’ 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기반’에 대한 이해를 얻는 것이다. 비교에 대한 용어 ‘실재에 대한 더 큰 정도’는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을 뿐이다:

 

(rg) x는 y 보다 더 큰 실재의 정도를 갖는다 iff x는 y를 기반한다

 

(fg)와 같이 (rg)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기반’ 개념에 대한 이해에 의존한다. 이것은 다음의 유일하게 가능한 방도인 것 같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Fa]가 사실 [Fb] 보다 더 큰 실재의 정도를 갖는지 여부를 말하는 것은 [Fa]가 [Gb]를 기반하는지 여부를 정립하는 것이다.

어떻게 ‘근본적인’과 ‘ - 보다 더 실재의 정도가 큰’이 ‘존재하는’, ‘집합적인aggregate’와 같은 다른 용어들로 넘어가는지 알아보는 것은 쉽다. (쉐퍼 2009)

 

(A) x는 존재하는 것이다 iff x는 근본적이다 또는 x는 파생적이다

(B) x는 순전히 집합적이다 iff 각 x의 진부분은 x를 기반한다

 

회의론자는 이 많은 용어들에 대해 기반 가설은 오직 ‘기반’만을 원초어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앞에서 보았던) 이 관련된 정의들을 고려할 것이다.  [즉 그들은 (A), (B)를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Daly는 정의 자체는 ‘기반’에 대한 이해에 결코 앞서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신에, 이 정의들은 우리가 이미 ‘기반’을 이해한다는 것을 요구하고, 여기서의 불만은 어떤 것도 그 필수적인 이해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만약 우리가 그 다른 용어를 이해하고 있다면, 어느 용어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그 다른 용어가 원래의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설명되어진다면, 우리는 작은 순환에 빠지게 되고, 우리의 이해는 더 확장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기반’, ‘근본적인’, -보다 더 큰 실재의 정도를 갖는’ 그리고 전술된 다른 용어들이 처한 상황이다.

정의 내리는 것 대신에, 기반 이론가는 ‘기반’을 포함한 문장과 사전에 이해된 용어를 포함한 문장 사이에 동치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접근도 앞에서의 정의 내리기 접근이 마주했던 곤경과 동일한 것에 열려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회의론자는 ‘근본성’, ‘ - 보다 더 큰 정도의 실재’ 용어를 거부할 것이다. 이 용어들은 ‘기반’ 보다 더 잘 이해된 것이 아니다. 위 경우와의 대조를 위하여, ‘환원’을 생각해보자.

 

(R) 로젠: 만약 P가 사실임이 Q가 사실임으로 구성된다면, P는 “사실 Q” 때문에 참이다

 

(R)에서 나타나는 곤경은 앞에서 본 것과는 다르다. X’s에서 Y’s로의 환원을 X’s와 Y’s가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표준적이다. 예를 들자면, 광파에서 전자기선으로의 환원은 광파와 전자기선이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지금 동일성은 우리가 기반은 비재귀적이고 비대칭적이라고 안 것과는 다르게, 재귀적이고 대칭적이다. 그렇다면, 동일성 관계와 기반 관계 둘다 있는 사실들의 쌍pair은 없다. 만약 ‘환원’이 위 같이 이해된다면, 주장된 연결들은 ‘환원’과 ‘기반’ 간에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환원’에 대한 이해는 ‘기반’에 대한 이해에 이용될 수 없다.

로젠은 다른 방식으로 ‘환원’을 이해하는 것 같다. 환원은 비언어적 존재자들 간의 비-소거적 관계에 있다고 가정되고, 이것은 “의미 번역 또는 의미 분석”으로 이해를 배제한다. 이것은 칸트적 형이상학 이전의 전통에서 나온 이해이고, 이 전통에서는 “X’s는 Y’s로 환원가능하다 Iff X’s는 Y’s 보다 덜 근본적이다”라고 정의되고, ‘근본적인’은 ‘기반’을 통해 정의된다. 이 묘책을 마주하는 분명한 문제점는 그것이 우리를 이 딜레마의 첫 번째 날개 ‘근본적인’과 ‘실재보다 더 큰 정도를 가진’과 같은 용어에 대한 우리의 빈약한 이해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즉, 달리는 로젠과 같이 이해한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환원에 대한 다른 예는 형이상학적 설명이다. 기반에 대한 말은 다음과 같은 정의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PE) x는 부분적으로 y를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한다 iff x는 y를 기반한다

(WE) Xs는 전체적으로 y를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한다 iff Xs는 y에 대한 모든 그리고 유일한 기반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설명에 대한 말은 다른 이름에 의한 기반에 대한 말일 뿐이다. 이것은 다른 개념에 대한 말이 아니다. 따라서 이 새로운 방도는 어떠한 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 이것은 ‘기반’에 ‘형이상학적 설명’이라는 다른 이름을 재부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단지 ‘기반’을 ‘형이상학적 설명’이라고 재부착함으로써 기반 개념을 다른 개념과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더욱이, 만약 우리가 형이상학적 설명에 대한 말을 선택한다면, 수반, 형이상학적 필연화 등을 통해서 그러한 말을 이해하는 것은 회의론자에게 열려있고, 그 때문에 기반에 대한 말과 형이상학적 설명에 대한 말 간 균열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현실 세계의 법칙에 대한 제약과 함께 ‘필연성’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하여 ‘자연적 필연성’ 같은 용어를 이해할 수 있다. ‘p는 자연적으로 필연적이다’는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자연에 대한 현실적 법칙이 p를 필연화한다. 우리는 어떤 적당한 제약 또는 수정과 함께 ‘설명하다’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하여 ‘기반’을 이해할 수 있는가? 김재권과 루벤은 어느 것이 다른 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결코 brute fact가 아니라는 직관을 갖는다. 모든 설명에 대하여, 근본적인 결정 요인이 되는 관계가 있다. 아우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요한 종류의 설명은, 그것을 참으로 만드는 것을 언급함으로써, 어떤 사실이 성립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임의의 그런 설명은 설명항과 피설명항 간의 결정 요인에 대한 근본적인 관계를 요구한다. ‘기반’에 대한 내용을 말하고자 할 때, ‘설명하다’에 있는 종류의 제약은 (인과적인 것과는 반대로) 형이상학적 결정 요인을 갖는 결정적인 관계이다. 기반은 단지 그러한 형이상학적 결정 요인이 되는 관계인 것으로, 수반 또는 형이상학적 필연화 같은 다른 비-인과적 결정 관계에 의해 대체될 수 없는 것으로 가정된다. 따라서, ‘기반’을 통한 제약과, ’설명하다’를 통한 ‘기반’에 대한 이해를 얻을 것은 없어 보인다.

 

요약하자면, 기반 이론가들이 호소하는 ‘기반’과 다른 용어 간 연결은 ‘기반’의 암묵적 정의를 제공하게 된다. 이 정의에서 사용된 다른 용어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결국 ‘기반’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여기서의 문제는 <우리는 그 용어에 독립된 이해를 결여한다>는 것이거나, 또는 <그것을 결여하는 한, 그 용어들이 ‘기반’과 연결을 낳는지 여부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c) 기반 이론가는 ‘기반’이 적용되는 사례를 제공한다 (아우디, 로젠, 쉐퍼) [* 파인의 표기 사용을 빌려오자면, 즉 ‘a < b’라고 할 때, 이것은 ‘a는 b를 기반한다’, ‘b는 a에 기반한다’라고 해보자.]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많은 사례를 가지고 있다: 물리적 사실 < 심리적 사실, 범주적 사실 < 성향적 사실, 비규범적 사실 < 규범적 사실, 자연적 사실 < 윤리적 사실, 부분에 대한 사실 < 전체에 대한 사실.

그러한 사례를 제시하는 것이 강력한 카드가 되는지는 미결정적이다. 어떻게 이 예들을 열거하는 것이 이 상황을 변화시킬 거라고 기대될 수 있는가? 대부분의 우리와 같이, 올리버와 호프웨버도 ‘때문에’ 문장, ‘존재론적 선험성’ 문장과 친숙하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이것들을 볼 때마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들은 단지 이해되지 못한 채 그것들을 요약할 뿐이다.

어떤 용어는 예들을 직접 지시하는 것을 통해 배워질 수 있다. 어쨌든, 그 회의론자들은 ‘기반’이 그런 방식으로 배워질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기반에 대한 사례에 친숙하고, ‘분할 정복’ 전략을 따를 수 있다. 그가 주장되어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제시된 그 사례들이 <어떤 사실이 다른 사실을 기반한다>는 일반 주장 만큼이나 당황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거나, 또는, 그는 수반, 동일성, 기반 관계와는 다른 관계들의 예로 최선으로 이해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례에 대한 호소는 주장 ③과 연결된다.

기반이 아마도 잘 작동한다는 사례에 더하여, 기반 이론가는 기반에 대한 회의론자가 인정하는 어떤 양상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기반에 호소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왜 자연적 사실에 대해 식별 불가능한 어떤 가능한 대상도 규범적 사실과 식별 불가능한지 아는 것을 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기반 가설은 그 자체를 그런 현상을 설명하는 하나의 후보이다. 

어떤 용어의 유용성의 정도는, 용어를 우리의 신념에 승인하는 근거의 상응하는 정도를 제공한다. (즉, 원초어에 대한 우리의 체계로 (콰인1951)). 그러나 오직 가지적인 어떤 용어만이 유용성을 갖는다. 즉, 오직 가지적인 용어만이 진정으로 우리의 이론화에 기여를 한다.

 

2.7 결어

 

굿맨은 모임classes에 대한 말을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것으로 간주한다. 그의 주장은 잘못된 충고다. 왜냐하면 모임에 대한 말은 수학과 과학 어디에든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반’의 가지성에 대한 회의론자는 더 좋은 기초ground 위에 있는가? 우리는 이 쟁점을 각각의 경우에 대한 이점 위에서 결정해야 한다. 루이스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거부하는 철학자는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에, 달리는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거부하지 않는 철학자들 역시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다고 말한다.

기반 논의를 중시하는 어떤 철학자들은 그것의 회의론자에게 좋은 답을 해야 한다. 이 철학자들은 어떤 범위의 답변을 갖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하게 대조되는 2 가지 응답을 고려할 것이다.

 

(응답 1) 만약 최고의 회의론적 전략이 기반 논의의 가지성을 묻는 것이라면, 회의론자들의 위협은 다루기 힘든 걱정이 아니다. 이들의 걱정은 가정된 형이상학적 양상성 논의에 대한 가지성 보다 더 긴급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전략으로서, 형이상학적 양상성에 대한 이 호소를 먼저 고려한 뒤, 기반과 유사한 것을 고려해보자. 

일반적인 전략으로서, 이 전략은 ‘새 소식이 없다’와 ‘전권이 없다’를 초래한다. 우리는 이미 어떤 용어들은 원초적이고 우리는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쟁점은 ’기반’이 그것들에 덧붙여질 수 있는지 여부이다. 그 전략은 또한 무차별적이다.  이것은 ‘기반’을 원초적으로 인정하는 만큼, 하이데거의 용어 ‘무’를 원초적으로 인정하는 자격을 제공한다. 그러나 원초어를 인정하는 전권은 없고,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체계를 최소화하는 좋은 방법론도 없다.

형이상학적 양상성과 기반 사이에 유사성이 있는가? 우리는 형이상학적 이론화에 독립적인 양상성 논의에 대한 이해를 얻는다. 우리는 <일상 언어로 평범한 사례들을 기술하는 방법>에 의해 이 양상성 논의에 대한 이해를 보인다. 가령, 우리는 비철학적 사례를 통해 우연성/필연성에 대한 구분을 소개한다. 대물적 사례는 대언적 사례와 동일하게 일상적 사례에 반대된다. 이 사례를 제시하는 것은 결코 대물적/대언적 구분 문제를 해소하지 못한다. 그 결과는 우리가 형이상학적 양상성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적 주장에 대한 독립적인 이유가 있고, 이 이해는 일상적 사례에 대한 일상적 기술에 의해 전달된다.

대조적으로, 기반 논의는 전적으로 철학자들의 방해인 것처럼 보인다. 기반과 양상성 간 비교는 거짓되어 보인다. <범주적 사실이 성향적 사실을 기반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성향 D가 범주적 기반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P를 가진 어떤 것도 D를 갖는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라는 그런, 어떤 비성향적 속성 P가 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근본적인 입자와 힘에 대한 과학자들의 논의는 기반 가설을 통해 이해될 필요가 없다. 이것은 단지 어떤 유형의 입자와 힘이 모든 다른 유형의 입자와 힘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어질 뿐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응답 2) 회의론적 도전에 대한 다른 극단적 응답은 초기 비트겐슈타인을 무시하고, 기반 논의는 ‘무의미를 해명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의미를 해명하는 것과 해명하지 못하는 것 간 구분 자체가 가지적인지 여부가 의문스럽다. 따라서 이 응답은 무의미를 해명하는 것에 대한 어떤 범주가 있는지를 생각하는 어떤 독립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임시 방편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반 논의가 무의미를 해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범주라기 보다는 해명하는 범주에 있다는 주장에 대한 특별한 호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