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numbers)는 존재(실존)하는가? 추상적 존재자인 수는 현실 세계에서 어떠한 질량, 부피도 갖고 있지 않다. 이는 숫자(numerical letters)와 다르다. 숫자는 백지 위에 잉크로 그려진, 수를 지시하는 물리적 존재자이다. 하지만 숫자가 지시하는 그 수는 속성, 의미, 명제와 같이 우리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대상이다. 이러한 수는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실존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메타형이상학" 분야에서 구하고 있다.
그중에서 나는 투마스 타코의 『메타형이상학 입문』 [1]을 주교재로 읽고 있다. 타코는 10년 전 내가 영미철학을 처음 접할 때 읽었던 『A Survey Of Metaphysics』의 저자인 E.J. Lowe 교수의 제자이다. 메타형이상학은 이름에서 그 의미를 갖고 있듯이 형이상학에 대해 다룬다. 잘 알다시피, 형이상학은 영어로 'meta'는 '의 너머'라는 뜻을 가진 "meta"physics이다. 참고로 이 'metaphysics'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현상에 관한 작품 『Physics』 뒤에 등장한 저작을 언급하는 데 기원을 갖는다. 철학에서 이것과 혼용되는 또 다른 용어 존재론 'ontology'도 있다. 이것은 그리스어 'Onta'는 존재(being)를 가리키는데, 존재론은 존재에 관해 연구하기 때문에 그리스어 Onta에서 비롯되어 Ontology가 되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은 세계란 무엇인가, 실재의 구조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등 있는 것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형이상학을 한 번 더 meta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지금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메타형이상학(metametaphysics)이다. 역자는 이것을 상위형이상학, 상위존재론으로 번역하기도 한다.메타형이상학은 형이상학을 메타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실존(existence), 양화, 존재론적 개입, 그리고 더 넓은 범위에서 형이상학의 방법론에 대해 연구하는 분야이다. 메타형이상학의 기원은 1940~1950년대에 콰인(Quine)과 카르납의 실존과 존재에 관한 논쟁에 기원을 둔다. 그들은 우리가 위에서 제기했던 '수는 실존하는가'라는 물음이 정말로 심오한지, 철학적으로 고려할 가치가 있는지를 다룬다. 즉 그들은 형이상학 일반에서 고려하는 수의 실존 여부를 넘어 그 질문의 형이상학적 의의를 찾는 데 관심이 있다.

먼저, 콰인은 「존재하는 것에 관하여」에서 존재와 실존을 구분하려는 마이농주의적 입장을 거부하며, 실존하지 않는 대상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를 비판한다.
We have all been prone to say, in our common-sense usage of ‘exist’, that Pegasus does not exist, meaning simply that there is no such entity at all [3]
콰인은 존재(being)와 실존(existence)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실존하지 않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실존에 대한 일의적인(univocal) 방식을 취한다. [1] 그에 따르면, 예컨대, 컴퓨터와 같은 물리적 대상에 실존을 귀속시킬 때와 동일한 방식으로 수(numbers)에도 귀속시킨다. 나아가, 콰인은 존재 (여기서는 실존으로 이해하자) 양화사 '∃'를 이용하여 실존에 대한 일의적인 뜻을 포착하게 해준다고 설명한다: 어떤 과학 이론의 문장을 일차 술어논리로 번역하면, 그 번역된 이론에서 양화사의 범위가 그 이론의 존재론적 개입을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죽었다'를 형식언어로 번역하면 M(*)를 is mortal이라는 술어로 정의하고 s를 Socrates라 할 때, M(s)일 것이다. 여기서 s가 예화되기 이전인 '∃(x)M(x)'로 번역한다면, 변항 'x'에 대한 양화사 ∃의 정의역 범위는 소크라테스를 포함하는데, 이것이 콰인에 따르면 실존하는 것이다. 반면, 술어 M은 양화하지 않는다. 즉, '은 죽었다'는 양화 범위가 아니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술어에 존재론적 개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2차 술어 논리학이 요구되는데, 이는 콰인에 따르면 추상적 존재자에 대해 실존을 귀속시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에 그는 이것을 피하고자 했다.
콰인이 거부했던 마이농은 이와 다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실존과 존재를 구분한다. 마이농에 따르면, 페가수스 같은 실존하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마이농주의는 페가수스는 실존이라는 속성을 갖지 않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하는 대상인 것이다. 콰인과 마이농의 견해 차는 사실 실존이 속성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즉 마이농은 실존을 일의적이지 않은 다의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페가수스 같은 실존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대상에 대해 상재(subsist)한다고 표현했다. 마이농의 입장은 존재와 실존의 의미가 일의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존재에 대한 물음 자체도 우리가 어떤 언어적 틀 안에서 말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콰인의 틀과 마이농의 틀이 다르듯이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카르납(Rudolf Carnap)은 존재론적 문제를 언어적 틀(framework)의 문제로 재해석한다.

그는 언어적 틀을 제시하기 위하여 아래 두 가지 질문을 구분한다.
1.내적 질문: 해당 틀 내에서 새로운 종류의 대상의 실존에 관한 물음
2. 외적 질문: 전체로서 대상의 체계의 실존이나 실재성에 관한 물음
내적 질문을 예로 들자면 'C60보다 큰 탄소 분자가 있는가?'이다. 이것은 과학의 틀(frame) 내에서 경험적인 방식으로 참 거짓을 얻을 수 있다. '가장 작은 소수는 무엇인가'도 내적 질문이다. 이것은 분석적으로 옳거나 그르다는 점에서 앞의 과학 틀과는 다르다. 다른 한편, 외적 질문은 '양자 역학은 파동 방정식의 객관적 실존에 개입하는가', '수는 실존하는가' 같은 것으로, 카르납에 따르면 이 같은 질문은 자유롭게 제기될 수 있다. 여기서 틀(frame)이란 새로운 종류의 대상에 대해 말할 목적으로 구성된 언어적 체계이다. 우리는 양자역학에 대한 형이상학을 말할 때든, 수에 대한 형이상학을 말할 때든 새로운 틀(frame)을 상대적으로 채택할 수 있다. 카르납에 따르면 이러한 틀 내부의 질문들은 해당 표현 체계의 규칙에 의해 해결된다. 예를 들어 그는 “100보다 큰 소수가 존재하는가” 같은 질문의 답은 관찰이 아니라 “새로운 표현들에 대한 규칙(rules for the new expressions)”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통해 얻어지며, 따라서 이러한 답들은 분석적(analytic)이라고 설명한다.[4]
Here again there are internal questions, e.g., ‘Is there a prime number greater than a hundred?’ Here however the answers are found not by empirical investigation based on observations but by logical analysis based on the rules for the new expressions. Therefore the answers are here analytic, i.e., logically true.
이러한 방식으로 언어 틀을 채택할 수 있다면 실존에 있어서도 언어마다 다르게 정의될 수 있다. A 틀 내에서 채택되는 실존 개념과 B 틀 내에서 채택되는 실존 개념은 다를 것이다. 이것이 언어 다원주의이다. 이는 실존을 일의적으로 해석하는 콰인과 대립되는 실존에 대한 다의주의이다. 나아가, 이것은 존재(실존) 양화사의 해석에 대한 차이로 이어진다. 카르납에 따른다면 양화사 변이(quantifier variance)라는 제목 아래 맥락에 따라 양화사가 해석될 수 있다. 언어 다원주의에 따르면 '수가 실존하는가' 같은 물음에 의견 차이는 없다. A틀 내에서는 실존하더라도 B틀 내에서는 실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존재론에 대한 의견 차이는 단순히 언어적인 의견 차이라는 견해가 따라 나온다. 이를 존재론에 관한 수축주의라 명명할 수 있다.
콰인은 「경험주의의 두 독단」에서 분석성과 종합성의 구분 자체가 명확하지 않다고 비판한다.[5] 이는 단순히 의미론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는다. 카르납의 언어 틀(framework) 개념은 바로 이러한 분석적 진리와 의미 규칙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콰인의 비판은 결과적으로 존재론적 논쟁을 언어적 틀의 선택 문제로 이해하려는 카르납의 언어 다원주의를 약화시킨다. 반대로 콰인은 위에서 보았듯이 존재를 양화사의 값이라는 단일한 방식으로 이해하며, 존재론을 실질적인 이론적 문제로 유지하려 했다.
But, for all its a priori reasonableness, a boundary between analytic and synthetic statements simply has not been drawn.
콰인과 카르납의 논쟁을 다시 돌아보자. 실존은 하나의 방식으로만 이해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언어적 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가. 콰인은 하나의 형이상학적 기준을 제시한 것 같다. 그는 존재론적 개입을 일차 술어논리에서 속박된 변항(bound variable)의 값으로 이해한다. 반면 술어, 논리 연산자 자체는 일차 술어논리에서 양화되지 않기 때문에 존재에 개입될 수 없다. 다른 한편, 카르납에게서는 외적 질문 관점에서 볼 때 콰인의 이러한 입장도 단지 하나의 틀(frame)일 뿐이다. 만약 서로 다른 틀이 채택될 수 있다면 존재론적 물음의 의미와 답 역시 달라질 수 있다. 카르납은 실존에 대해 다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둘의 논의가 동일한 층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일 수 있다. 콰인은 실존에 대한 논의를 하고 카르납은 틀에 대한 논의를 한다. 카르납은 더 추상화된 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카르납의 전략인 것 같다. 그는 "속성, 명제, 의미"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직접 형이상학적 주장을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것도 용인될 수 있는 여지를 언어적 틀을 동원하여 열어두었기 때문이다. 즉 콰인의 입장이 하나의 틀일 뿐이고, 다른 한편에서 "속성, 명제, 의미"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입장도 하나의 틀일 뿐이라고 열어두었기 때문이다.
나는 콰인과 카르납의 논쟁에서 카르납 편에 기울여진다. 나는 콰인이 존재를 일의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지나치게 엄격해 보인다. 책상과 같은 물리적 대상은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명제 같은 추상적 대상은 추상적으로 존재하며, 페가수스 같은 대상은 실존하지 않더라도 상재(subsist)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다른 한편으로, 콰인이 존재의 방식을 여러 개 인정하지 않는 이유로는 존재를 양화 논리로 판정하려는 목표가 있었던 것 같다. ∃ 자체가 concrete ∃, abstract ∃, subsistent ∃ 등으로 분화된다면 논리의 통일성이 무너진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는 부풀려진(inflated) 존재론을 피하면서 오컴의 면도날에 따라 절약적인 존재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예외적으로 수(numbers)나 집합(sets)처럼 수학과 과학에 필수적인 추상 객체는 존재론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콰인의 존재론이 단순히 추상 객체를 거부하는 경험주의적 입장이 아니라, 최선의 과학 이론이 요구하는 존재자들에 개입하려는 자연주의적 태도였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참고 문헌
[1] 투마스 타코, 『메타형이상학 입문』, 박준호 옮김, 서광사.
[2] David J. Chalmers, David Manley, Ryan Wasserman (eds.), Metametaphysics, Oxford University Press.
[3] W. V. O. Quine, “On What There Is,” Review of Metaphysics 2 (1948): 21–38.
[4] Rudolf Carnap, “Empiricism, Semantics, and Ontology,” Revue Internationale de Philosophie 4, no. 11 (1950): 20–40.
[5] Quine, W. V. O. “Two Dogmas of Empiricism.” The Philosophical Review 60, no. 1 (1951):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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